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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지 ‘참 소중한 당신’ 신명자 상임대표 인터뷰 보도

우리 가장 가까이에 있는 예수님, 북한 주민을 돕는

<취재_ 김선여 사진_인영오>

 

(사) 평화 3000 신명자 상임 대표

 

작년 12월 17일 북한 김정일 위원장이 사망했다는 뜻밖의 소식이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 현대 사회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3대 세습과 북한 체제, 핵 문제, 그리고 주변국과 강대국의 이해관계가 섞여 우리는 물론 온 세상의 이목이 북한에 집중됐다.

이렇게 북한에 대한 관심이 급증한 요즘, 평화와 통일의 가치를 추구하고 남북 교류 협력을 위해 노력하는 ‘(사) 평화 3000’(이하 3000) 신명자(베로니카, 인천교구 은행동 본당) 상임 대표를 만났다. 한때 빈민 운동의 대부로 불린 제정구(바오로, 선종) 의원의 아내로서, 빈민 운동에 헌신하고 복음자리 사업을 이끌어 온 신명자 대표. 그가 3000에 동참하게 된 이유와 그의 눈에 비친 북한 주민들의 모습, 대북 지원 실태, 앞으로의 바람 등을 들어 보았다.

 

 

빈민 운동과 복음자리 사업

신명자 대표가 빈민 운동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은, 1973년 국문학을 전공하던 대학 시절에 우연히 서울 청계천에 간 게 계기가 됐다. 남편 제정구 의원을 알게 돼 빈민 운동을 하게 되었고, 그곳 아이들을 돌보았다. 그해 10월 복음을 입으로만 살고 있다는 회의를 느낀 정일우(요한, 미국명 존 빈센트 데일리, 예수회) 신부 또한 청계천 판자촌으로 한 달 실습을 왔다. 그때 정 신부와 제정구 의원이 만났고, 그들은 철거민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

“저와 남편은 개신교 신자였어요. 신교인 우리 부부와 구교인 정일우 신부님이 연합해서 빈민 운동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신부님과 일을 하다 보니 미사를 많이 드리게 되었어요. 말씀 중심인 개신교 예배와 달리 가톨릭 미사는 전례 중심이고, 무엇보다 미사 중에 회개하고 묵상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 좋았습니다. 그때 큰아이를 임신 중이었는데 아이들을 가톨릭 신앙인으로 키워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1976년 세례를 받고 개종했지요.”

그렇게 청계천 판자촌에서 시작된 빈민 운동은 서울 양평동 판자촌으로, 경기도 시흥의 복음자리로 옮겨져 지금의 사회복지 법인 복음자리가 탄생했다.

“처음에는 철거민들의 복음자리였어요. 그런데 그들 일거리도 중요했지만 활동가들이 먹고사는 것도 필요했어요. 여러 가지 일을 시도했고 복음자리 잼을 함께 만들었어요. 이제 복음자리는 안정이 돼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있습니다. 1996년 사회복지 법인으로 바꾸고 ‘작은 자리’라는 일종의 마을 회관을 지었어요. 지금의 작은 자리 종합 사회복지관인데, 그 안에 신협과 도시 빈민연구소, 유치원, 공부방을 만들었지요. 가장 낮은 자들이 쉽게 자리 잡을 수 있는 곳이 되고자 노력해 많은 사람이 향유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사) 평화 3000

제정구 의원은 통일과 통일 후의 동북아에 관심이 많았다. 그가 선종한 후 신 대표는 남편의 유지를 받들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을 찾았다. 북한 민족이 마음 한 부분을 차지했고, 2002년 정의구현사제단이 전세기로 북한을 방북할 때 그도 동행했다. 그때 북한 주민들의 삶을 보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아팠다고 한다.

“북한은 1995~1996년 ‘고난의 행군’ 이후로 매우 힘들었어요. 가로등을 못 켜서 사방이 아주 캄캄했지요. 우리가 머문 호텔도 마찬가지였어요.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그 후 어떻게 북한을 도울 수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신부님 몇 분과 의논해서 2003년 11월에 (사) 평화 3000을 만들었어요. 현재 박창일(사도 요한, 예수성심전교수도회) 신부님이 운영위원장으로 활동하시고, 사제‧수도자‧평신도‧목사‧종교가 없는 분들까지 함께하고 있습니다.”

3000은 평화·화해·나눔·상생의 세상을 지향하는, 통일부에 등록된 비영리 법인이자 일반 시민 NGO다. 통일 전문가나 관심이 있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만드는 평화’가 모토다. 삼천 리 금수강산이 평화롭기를 바라고, 온 국민이 한 달에 삼천 원씩을 내서 북한을 돕자는 의미로 ‘평화 3000’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북한 주민들을 돕고 싶어요

신 대표는 그 후 여러 차례 북한을 방문했다. 다른 방북자들보다 북한 주민을 많이 접했고, 그들과 친해져서 북한의 실상을 더 잘 볼 수 있었다. 우리가 먹고 남긴 음식을 챙기고, 깜깜한 밤에 교대로 일을 하러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고, 평양을 벗어나면 짐을 이고 진 채 걸어 다니고, 다리가 없어 개울로 건너고, 백두산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로 생활하고, 자동차를 몰라서 보고 숨는 아이도 있고…. 이런 주민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무척 아팠다고.

“우리 주된 사업은 북한을 돕는 겁니다. 대북 지원과 남북 교류는 물론이고 우리 국민에게 평화와 통일 교육을 하는 거지요.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서 북한과의 교류가 힘들어져 해외 사업(베트남과 라오스에 학교와 집 지어 주기·식수 개발과 화장실 개선해 주기·의료 지원하기 등)과 국내 사업(저소득 민간 공부방을 지원하기)을 확대해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간절히 하고 싶은 것은 북한을 돕는 겁니다.”

3000에서는 북한 지원 사업으로 크게 4가지를 해 왔다. ‘콩 우유 공장’은 남과 북이 협의해서 세운 공동 사업이다. 북한에서 장충 성당 뒷마당에 공장을 지어 생산과 배급을 담당하고, 생산 시설(전기, 설비, 냉장 탑차, 스테인리스 컵 등)과 원료는 3000에서 보내 주었다. 그렇게 만든 콩 우유는 하루 5,000잔씩 북한 아이들에게 배급됐다. ‘두부 공장’ 사업은 남포와 평양 두 곳에 생산 설비와 원료를 제공했는데, 하루에 800모를 생산해 어린이와 노인들 영양 공급에 도움을 주었다. 또한 못자리용 비닐과 양파 재배용 비닐, 비료 등 ‘농업’ 지원도 했다. 그리고 ‘체육 시설 현대화’ 지원 사업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방치된 평양시 체육단 축구장을, 인천시(남북협력기금)와 국민체육진흥공단의 도움과 모금을 해서 개보수를 해 주었다. 또 기업과 연계해 노인들이 사는 곳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고, 수해 때는 밀가루도 보냈다. 북한 주민들이 참 좋아해 기쁘고 흐뭇했는데, 모두 1년째 중단된 상태다.

 

북한에 한번 다녀온다면…

3000이 북한을 지원할 수 있는 것은 정의구현사제단이 바탕이 되고, 우리나라에 기본적으로 가톨릭에 대한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교구와 본당 민족화해위원회와 연계해서도 일하며, 수녀들 도움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3000과 일을 하는 북한 사람도 다 가톨릭 신자로 책임 위원장은 모태 신앙인이다. 평소에 이들끼리 공소 예절을 하다가, 3000이 북한에 가면 장충 성당에서 함께 미사를 드리고 성가를 부르며 인사를 나눈다. 그게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는 신 대표는 3000이 하는 일이 북으로 가는 통로인 것만도 매우 감사하다고 한다.

“많은 분이 북한을 도와주면, 그 혜택이 북한 주민에게 가지 않고 핵을 만들거나 전쟁 준비로 쓰이는데 왜 도와주느냐고 하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낸 것을 북한 주민들이 잘 사용하고 있어요. 3000일을 하기 전에 된장과 고추장 2000개를 인천교구 민족화해위원장 오용호(세베리노) 신부님을 통해 보낸 적이 있는데, 그것을 기억해서 감사 인사를 하더군요. 그 고추장과 된장을 담던 통을 그릇으로 사용하고 있고요. 또 우리가 보낸 천으로 한복을 만들어 입고 성당에 나와요. 물론 우리가 보낸 식량이 북한 군인들에게 먼저 갈 수도 있어요. 하지만 군인 대부분이 공병이고 그들이 바로 북한 주민이에요. 제게 손주가 생기니 아이들이 매우 소중합니다. 북한 아이들은 우리 가장 가까이에 있는 예수님이에요. 그들을 돕지 않으면 누굴 돕겠어요? 그리고 아직도 북한이나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으로 정말 북한이 그렇게 못 사냐며 믿지 않고 북한을 잘못 아는 사람도 있어요. 북한에 다녀온다면 절대 그런 말을 못할 거예요. 저는 그래서 북한을 왜 돕느냐는 사람들이나 북한을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제발 북한에 한번 다녀오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럼 알게 될 거라고요.”

신 대표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우리 민족 북한의 생존을 함께 해결해 나가기 위해, 꼭 3000을 통해서가 아니더라도 온 국민이 참여해 도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 신자들도 사순이라는 특별한 시기에 북한 돕기에 동참하기를 바란다고. 단, 북한을 돕되 북한의 자존심은 지켜주어 생색내지 말고 조용히 도와주자고 한다.

“북한의 교육 수준은 꽤 높은 편이에요. 그래서 저는 북한에도 희망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김정은 부위원장이 외국에서 공부했으니 개방 속도가 빨라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얼른 북한 체제가 안정되고 개방돼 굶어 죽는 아이가 없어야 해요. 우리 또한 북한을 인정해야 하고요. 남북 관계가 개선돼 계속 교류하다 보면 저절로 북한이 개방되고, 개성 공단이 활성화 돼 북한이 먹고사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너무 빨리 중국화 되는 건 걱정입니다. 철광이나 탄광을 중국에 다 팔아버리고, 북한에는 온통 중국 물건이에요. 그동안 남북 교류로 이룬 민간 무역도 다 단절되고, 중국에게만 좋은 일이 된 것 같아 참 안타까워요.”

생명의 물길을 만들고, 좋은 물길을 찾아서 다 같이 가자는 신 대표. 있어서 나누는 게 아니며, 마음으로도 나눌 수 있기에 모두 나누는 마음을 지녔으면 좋겠다고 한다. 함께 나누는 사회·상생하는 사회가 우리 안에, 신앙 안에 있기를 바란다는 그의 바람대로, 모두 가진 것을 나누어 전 세계가 공존공생 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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